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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시사 상식

(홍콩 시위, 홍콩 국가보안법 총정리) 2. 홍콩 국가보안법의 시작 - 2003년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

 

앞선 포스팅에서 말씀드렸듯이,

 

홍콩이 영국령에서 중국령으로 반환된 1997년 7월 1일부터 2020년 현재까지 있었던 홍콩의 모든 이슈들은 '같은 맥락의 연속선'입니다.

 

바로 '일국양제'이죠.

 

그런데 말이 '일국양제', '홍콩의 자치권 보장'이지,

 

중국은 '일국' 거리면서 홍콩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하고,

 

홍콩은 '양제'를 외치면서 자유를 수호하고자 한다고 했었죠.

 

 

이게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이슈들을 가로지르는 핵심입니다.

 

즉, 중국은 홍콩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하고, 홍콩은 이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수호하고자 하면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죠.

 

그리고 이 갈등의 처음으로 눈에 띄게 발생한 사건이 바로 오늘 소개할 '2003년 국가보안법 제정 반대 시위'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의 상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1989년 톈안먼 사건1990년 초부터 시작된 파룬궁 사태가 터졌습니다.

 

톈안먼 사건은 말 그대로 '민주화 운동'의 일환이었고, 

 

파룬궁 사태는 '민주화'와 관련된 사건은 아니고 그냥 단체가 커지니까 중국이 탄압하고 통제한 겁니다.

 

두 사건의 맥락은 완전히 다르지만, '자유를 향한 움직임' vs '자유를 탄압하는 중국 공산정권' 이라는 점에서는 결을 같이 하고 있죠.

 

중국은 골치가 아팠습니다.

 

통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강해질수록 '전체주의 공산정권'은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톈안먼 사건과 파룬궁 사태 이외에도 중국의 골칫덩어리는 더 있습니다.

 

'일국양제' 원칙 하에 다른 체제로 운영하고 있는 '홍콩''마카오'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일개 지방으로 간주하려 하는 '대만'

 

아직도 여전히 독립을 외치고 있는 '위구르''티베트'

 

중국은 이렇게 '전체주의 공산정권'을 흔들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 중국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죠.

 

 

홍콩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홍콩 내에서 반(反)중국 정서가 확산되면 중국은 너무 너무 골치가 아픕니다.

 

물론,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주요한 외국인 투자 창구 역할을 하는 홍콩 경제를 위태롭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홍콩으로부터 혹시나 민주화 바람이 불면 중국 전체로 번지면서 다시 한 번 '공산정권'이 흔들리는 것을 너무나 우려하고 있죠.

 

그래서 홍콩의 체제를 인정해주려고 하면서도 철저하게 중국의 통제 하에 두고자 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도가 바로 2003년에 있었던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 시도'였던 겁니다.

 


 

자, 그럼 이를 바탕으로 다시 홍콩의 상황으로 돌아가봅시다.

 

1997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홍콩은 영국령에서 중국령으로 반환이 됐죠.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식'

 

이때 중국 정부는 분명 '일국양제'를 약속하고,

 

이 '일국양제'라는 개념에 따라 중국 본토와는 전혀 다른 정치/경제 체제로 운영을 하기로 했습니다.

 

중국 본토는 일당독재/공산주의 체제이지만, 홍콩은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로 운영하고,

 

중국 본토와는 다른 홍콩만의 법률인 <홍콩 기본법>의 적용을 받고,

 

또, '행정장관'이라는 '홍콩의 대통령격'을 직접 홍콩 사람들이 뽑게 된다고 했었죠.

 

하지만, 실제로 홍콩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선, 홍콩의 대통령격인 '행정장관'을 뽑는 과정도 시민들이 직접 뽑는 '직선제'가 아니라 '간선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편 '우산혁명' 때 자세히 얘기해보겠습니다.)

 

또 위의 '허버트 런던'의 말처럼 '입법의원(우리나라의 국회의원격)' 총 60명 중 24명만이 직접 선출되며, 나머지 36명은 '친중국 성향'의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됩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홍콩의 대통령격부터 국회의원격들까지 대부분이 '친중국' 성향일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죠.

 

 

 

쉽게 말하면, 애초에 홍콩 정부에 중국이 자기 사람들을 심어놨다는 겁니다.

 

왜?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죠.

 

그 중 가장 대가리가 '행정장관'이겠죠?

 

1997년 첫 행정장관은 '둥젠화(퉁치화 라고도 부름)'였습니다.

 

홍콩의 행정장관의 임기는 5년, 그리고 1차에 한해 연임할 수 있습니다.

 

둥젠화 장관의 임기는 1997년 ~ 2002년이었고, 2002년 재선에 성공해 연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임을 시작한 바로 그 해, 2002년 9월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을 시도합니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도대체 그럼 '홍콩 국가보안법'이 뭔데?

 

하시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지금부터 잠시 '국가보안법'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국가보안법 얘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바로 '홍콩 기본법 제23조'일 겁니다.

 

바로 이것이죠.

 

홍콩은 중국의 법을 따르지 않고, 자체 헌법이 존재한다고 했었죠?

 

그 자체 헌법이 바로 '홍콩 기본법', 정확히는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입니다.

 

자,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기 전에 이미 이런 법률은 이 기본법에 존재합니다.

 

위의 내용과 같이 말이죠.

 

 

 

그런데, 이미 존재하는데 도대체 뭘 제정하겠다고 난리인거지?

 

저기 저 법을 자세히 보시면,

 

 

"홍콩특별행정구는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여 ~~~을 금지해야 한다" 라는 식입니다.

 

즉,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해서 금지해야 된다고만 명시돼 있을 뿐입니다.

 

저 내용을 어겼을 경우 어떻게 처벌하겠다는 내용, 즉 처벌 규정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 법에 따르면 홍콩은 '법을 제정해야' 하지만 홍콩은 약 5년 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죠.

 

왜?

 

이 법을 만들 경우 홍콩 시민들이 동요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2~2003년에 그 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선 게 바로 논란이 되는 '홍콩 국가보안법'입니다.

 

 

 

가만히 보면 크게 문제될 것 같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국가를 배반하고, 분열시키며, 반동을 선동하는 행위"는 좋지 않은 행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금지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까지가 국가를 배반하고, 분열시키고, 반동을 선동하는 행위인가' 입니다.

 

중국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것, 1989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톈안먼 추모 시위'를 하는 것도 모두 이에 해당한다고 해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는 완전히 홍콩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는 '독재'가 되는 셈입니다.

 

 

 

자, 다시 돌아와 보겠습니다.

 

 

둥젠화가 이끄는 행정부는 2002년 9월, 이 '홍콩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겠다고 처음 말을 꺼냈습니다.

 

이때부터 시위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둥젠화 정부는 10월 ~ 12월까지 3개월간의 공청회까지 진행하고,

 

2003년 초에는 입법위원회에 상정, 2003년 7월 9일 입법을 하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에 2003년 7월 1일.

 

정확히 홍콩 반환 6주년이 되던 날, 전 국민의 1/10이나 되는 50만명의 홍콩 시민들이 도심으로 쏟아져나와 "국가보안법 반대"를 외치며 홍콩 사상 첫 대규모 시위가 시작됩니다.

 

2003년 홍콩 시위 당시 보도 (출처 : SBS)

 

 

하지만 2003년 7월 5일까지도 둥젠화 장관의 행정부는 굳건했습니다.

 

 

출처 : MBN

 

그러던 와중,

 

친정부 정당인 자유당의 '톈페이춘'이라는 분이 입장을 선회하면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톈페이춘 형님이 시위가 한창이던 7월 4일, 중국 본토로 넘어가 베이징에서 당국자들을 만나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미 7월 1일부터 홍콩 행정부는 민심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국 본토 당국자들은 어떻게 입법할 것이고 언제 할 것이고 따위의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냥 입법만 성사시켜라" 라는 말을 듣고 오게 됩니다.

 

 

말 그대로 현타가 빡세게 온 겁니다.

 

그렇게 텐페이춘 형님이 처음에는 12월로 입법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국이 시킨다고 "예 형님;;ㅎㅎ" 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과 시기를 홍콩이 자체적으로 더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겠죠. (제 추측입니다)

 

그런데 홍콩 정부가 아마 말을 안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6일 텐페이춘 형님이 행정회의 위원직 사퇴를 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홍콩 입법회의의 전체 의석은 60석입니다.

 

그 중 친정부 세력은 23명이었습니다.

 

이들은 과반을 넘기기 위해서는 8명이 더 필요한데, 자유당이 딱 8명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자유당 우두머리가 방향을 바꿔버린 겁니다.

 

이렇게 되면 법안을 통과시킬 수가 없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결국 2003년 7월 7일, 입법예정일인 9일을 이틀 앞둔 시점에 둥젠화 행정장관은 입법을 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홍콩의 50만 시민들의 시위가 성공을 거둔 순간이자, 중국 정부가 겪은 최초의 좌절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홍콩 시민들은 시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단순히 '국가보안법 제정'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목적은 '민주화'이고, '자유'입니다.

 

그들은 둥젠화 장관의 퇴진을 요구했고,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향한 외침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 17년 뒤, 2020년 5월 28일...

 

출처 : SBS

 

'홍콩 국가보안법'이 제정됩니다.

 

17년 전 50만명의 홍콩 시민이 지켜낸 '자유'는 17년 뒤 다시 좌절됐습니다.

 

이게 현재의 홍콩 시위의 기본적인 배경이고 이유입니다.

 

 

 

다음편은 '우산혁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